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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교묘한 선동으로 권력잡은 나치 괴벨스… 언론사부터 통폐합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4] 교묘한 선동으로 권력잡은 나치 괴벨스… 언론사부터 통폐합했다.

                                       조선일보. 발행일: 2022.04.26.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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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벨스, 프로파간다의 천재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는 역사상 최고의 프로파간다 (선전·선동) 전문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히틀러가 1차 대전 패배의 굴욕으로부터 독일을 구해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어줄 

구세주라며 교묘하게 선전했다. '히틀러 무오류설' 신화를 만들어낸 괴벨스는 나치 체제에 핵심적인 기여

했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치즘은 분명 다른 방식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남을 속이려는 자는 우선 자신에 대한 거짓말부터 하는 법. 괴벨스는 다리를 절었다. 아마도 어릴 때 소아

마비에 걸렸든지 혹은 선천적 내반족 증상(다리가 안으로 굽는 증상) 때문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1차 대전

때 부상당한 결과라고 강변했다. 

 

 나치는 흔히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히틀러의 많은 수하는 그들이 주장하는 아리안족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게 허약한 모습이었다.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TV와 SNS 시대라면 괴벨스의 왜소한 모습이 약점이었을 테지만, 대중연설과 

라디오의 시대였기에 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큰 보탬이 되었다. 

 

 히틀러를 만나자마자 괴벨스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일기에 히틀러를 정치 천재라고 칭했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였다. 운명의 징조인가? 아돌프 히틀러여,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이렇게 오글거리는 내용을 

일기에 쓸 정도면 진정 히틀러에게 매료되었던 것 같다. 

 

 1924년 혹은 1925년 나치당에 가입한 그는 당 기관지 '공격(Der Angriff)'을 창간하고, 바이마르 체제를

그야말로 끊임없이 공격했다. 포스터 제작, 슬로건과 이미지 창안, 가두 행진 조직 등 정열적으로 프로파

간다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말로만 싸운 게 아니라 폭력 투쟁도 불사했다. 나치당은 1930년대를 경과하면서 세를 크게 불려갔는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6000회에 이르는 집회를 조직하고, 수백만 부의 소책자와 포스터를 뿌려대는 

동시에 군화, 경찰봉, 손가락 마디에 끼우는 쇳조각으로 무장한 시위꾼들을 동원하여 정적들 힘으로 

눌렀다. 

 

 한 달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오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면서 나치는 드디어 최대 정당으로 올라섰다. 

 후일 히틀러는 괴벨스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면서 만일 그가 없었다면 베를린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라

고 이야기했다. 

 

 괴벨스는 집회에서 히틀러가 연설하기 전에 먼저 등장하여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했는데, '마치 나이

아가라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힘 있는 바리톤 목소리로 군중을 좌지우지했다. 감정적이지만 내용이 뒤죽

박죽인 히틀러의 연설은 듣는 사람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으로 남지만, 논리정연하면서 강력한 

괴벨스의 연설 내용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게 당대의 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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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그는 프로파간다 담당 장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이 부서의 인원1000명 넘게 늘리면서 미디

어를 완전히 통제했다. 그의 목표는 국민들의 사고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여러 언론사를 통합하여 '독일뉴스국'으로 만들었고, 법을 바꾸어 기자들이 자기가 쓴 내용

에 대해 책임지도록 만들었다. 괴벨스는 언론 관련 콘퍼런스를 자주 개최하여 특정 사안마다 어떤 방향으

로 기사를 쓸지 지시했다. 

 

 분명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매체 중 하나는 라디오였다. 싼 가격으로 '국민 라디오(Volksempf?

qnger)'를 각 가정에 보급하여 나치가 원하는 내용을 무차별 주입했다. 

 

 또 영화에도 관심이 커서 자신이 통제하는 영화 스튜디오에서 1933~1945년 동안 1361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악랄한 반유대인 인종주의 작품인 '유대인 쥐스(Jud Suess)'가 대표작이다. 

 

 사실 괴벨스 자신은 스토리 안에 이데올로기를 숨겨 은근히 전파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히틀러

의 취향에 맞추어 노골적인 선전 영화도 만들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체제를 선전하는 

좋은 프로파간다 기회였다. 

 

 이때 히틀러와 친분이 있는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하여 유명한 선전 영화를 제작했다. 효율적인 선전을 

하려면 새빨간 거짓말보다는 차라리 왜곡된 절반의 진실을 기술적으로 제시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사람들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믿을 대상을 필요로 한다. 내용이야 

어쨌든 간에 무엇인가를 믿게 만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괴벨스는 히틀러의 이너 서클에서 밀려났다. 사실 그는 전쟁 

개전에 반대했고, 스탈린과 충돌하기보다는 타협하는 방향을 선호했다. 이처럼 히틀러의 뜻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권력의 정점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그가 다시 힘을 발휘한 것독일군이 패전을 맞이한 이후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여

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히틀러는 다시 그를 불러들였다. 괴벨스는 베를린의 슈포르트팔라스트 스타디

에서 '아시아의 약탈 민에 맞서는 총력전(Totaler Krieg)'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했다. 

 

 제대로 실력을 발휘한 그의 연설에 군중은 열광적으로 달아올랐다. 러시아 야만인들의 볼셰비즘 체제에

맞서 유럽 문명을 지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현재 우리가 보기에는 유치한 연설들이 위

기에 빠진 독일 군중을 분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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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히틀러 제거 음모를 미연에 방지한 공로까지 인정받아 그는 나치 체제 마지막 시기에 요직을 

차지했다. 이제 그는 노골적인 히틀러 신성화 작업을 수행했다. '우리 안에 총통이 있고 총통 안에 우리가

있다'면서, 몸과 영혼을 바쳐 광신적으로 싸우자고 독려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 비정상적 제국의 몰락으로 치달아갔다. 말기적 상황에서 남을 속이기 전에 그들 

스스로 속이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졌다. 전쟁 말기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병사했는데, 이 사건

을 두고 괴벨스는 독일사의 기적이 재현될 것으로 믿었다. 

 

 과거 7년전쟁 (1756~1763) 말기프로이센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패망 일보 직전에 몰렸을 때 러시아

의 여제 엘리자베타가 사망하고 새로운 차르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

의 열렬한 찬미자를 자처하는 새 차르는 곧바로 전선에서 철군했고,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자살할 기회를

찾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기사회생하였다. 

 

 이를 '브란덴부르크의 기적'이라고 칭하는데, 괴벨스는 루스벨트의 죽음을 계기로 미국 내에 반전 분위기

가 달아올라 미군이 철수하는 똑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두 사람은 일시적으로 헛된 희망을 품었지만 물론 사태는 그들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종말이 다가왔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괴벨스가 수상직을 차지했으나 이미 

나치 체제는 회복 불가능한 단계였다.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는 여섯 아이에게 독약을 먹여 죽이고 자신

도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괴벨스는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부하들에게 온 가족의 시신을 석유로 태워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그다는 괴벨스 이전에 결혼했던 전 남편에게서 얻은 아들 하랄트(그는 이탈리아에서 영국군에게 포로

로 잡힌 상태였다)에게 남긴 편지에 히틀러가 없는 세상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죽음

을 선택하였으며, 남은 길은 총통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썼다. 괴벨스 부부는 마지막 순간

까지 히틀러에게 진정으로 충성스러웠던 것 같다. 

 

 히틀러는 생전에 괴벨스-마그다 부부가 전형적인 아리안족 커플이라고 치켜세우곤 했지만, 마그다가 

어릴 때 유대인 회당에 열심히 다녔다는 사실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프로파간다를 주요 축으로 삼아 지탱하던 나치 체제는 실상 모순과 거짓의 제국이었다.

 

"큰 거짓말을 반복하면 대중은 결국 믿게 된다" 오늘날에도 낯설지않네

"거리를 지배하는 자가 대중을 지배한다. 대중을 지배하는 자는 국가를 지배한다."

"물고기가 물을 원하듯 베를린은 센세이션을 원한다."

"우리가 일단 권력을 잡으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시체가 되어 끌려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최고의 정치가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아니면 최악의 범죄자로 기록될 수도 있겠지만."

"거대한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면 대중은 결국 그것을 믿게 된다."

"19세기에 신문이 한 역할을 20세기에는 라디오가 한다."

"대중은 언제나 똑같은 상태다. 멍청하고, 욕심 많고, 잘 잊어먹는다."

 

 괴벨스가 남긴 명언들을 곱어보면 묘하게 낯익은 느낌을 받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길거리 투쟁이 

권력 쟁취의 지름길로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잡은 권력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으려 한다. 

 

 아침저녁으로 저질 오염된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거짓말이 진실로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믿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혹시 그들은 우리 국민이 여전히 '멍청하고 욕심 많고 잘 잊어먹는' 부류라

고 생각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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