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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남산 지킨 힐튼, 정녕 부수는 게 답일까

[터치! 코리아] 40년 남산 지킨 힐튼, 정녕 부수는 게 답일까 

                                                         조선일보 2022-01-22. 김미리 문화부 차장

 

 1982년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수업 시간. 당시 강사는 미국에서 온 건축가 김종성이었다. 조국에 번듯한 호텔 하나 지어보자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제안에 미국 일리노이대 교수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귀국한 인물이었다.

 

 그가 하루는 수업에 특별 연사를 초청했다.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을 이끈 쌍두마차 김중업(1922~1988)이었다.

 

 기념사진 하나 없지만, 이날 수업은 한국 건축사에서 진귀한 장면이 됐다. 두 사람은 '20세기 근대 건축의 3대 거장'에게 직접 배운 딱 두 명의 한국인이다.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 김종성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제자다.

 

 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세계 건축의 중심을 두드린 호기로운 청년들이었다. 두 거장의 대리전을 보기 위해 몰려온 학생들로 이날 강의실은 미어터졌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작년 두 건축가의 대표작이 엇갈린 운명에 처했다. 김중업의 청계천변 삼일빌딩(1970년 

완공)과 김종성의 남산 힐튼 호텔(1983년)이다.

 

 삼일빌딩은 건축가 최욱이 김중업의 설계안을 최대한 살려 정교하게 리모델링했다. 반면 남산 힐튼 호텔은 부동산개발회사에 팔려 철거를 앞두고 있다. 새 소유주는 호텔을 헐고 대규모 상업 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호텔은 올 연말 문 닫는다.

 

 40년간 남산 자락을 지킨 랜드마크를 싹 밀어버리겠다는 발상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남산 힐튼은 고도성장 시대 우후죽순 빌딩이 올라갈 시절, 동시대 세계 건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김우중이 전폭적으로 밀어준 덕에 김종성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에게 배운 기량을 맘껏 펼쳤다. 무엇보다 반세기 가까이 남산과 서울역 곁에서 서울의 산업화를 굽어보고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건물이다.

 

 한류로 문화 강국 반열에 올랐다고 의기양양하면서, 돈 주고도 못 사는 우리 안의 문화유산은 제 발로 걷어찬다. 전형적인 '문화 졸부'의 모습이다.

 

 김승회 서울대 교수는 기자에게 "신라 범종을 녹여 가마솥 만들겠다는 처사"라며 "수익성만 따져 멀쩡한 보물을 부수는 건 '개발 탈레반'"이라고 목청 높였다.

 

 당사자는 오죽하랴. 얼마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분신이 찢겨 나가는 아픔을 토로했던 미수(米壽)의 건축가는 요즘도 눈만 뜨면 관련 뉴스를 확인한다. 머리 맞대면 흔적을 남기면서 개발하는 방안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앞으로 '제2의 힐튼'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개발 연대에 지은 많은 건물이 노후화돼 철거냐 구조 변경이냐 갈림길에 서있다. 힐튼 사태는 우리가 먼 과거의 문화유산에 비해 비교적 가까운 30~50년 전 근현대 유산을 도외시했다는 점을 일깨운다. 가까운 과거도 결국 먼 과거가 된다.

 

 모든 건물을 보존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진짜 가치 있는 건물을 지킬 장치가 필요하다. 현행 등록문화재 제도는 예외 규정은 있지만 원칙적으로 50년 이상 된 건물을 대상으로 해 이 중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을 정한다.

 

 반면 역사가 짧은 미국 같은 경우는 더 적극적이다. 예컨대 '뉴욕시 랜드마크 보존위원회'는 30년 이상 된 건물을 대상으로 랜드마크를 지정한다. 삼일빌딩의 모델이자 김종성의 스승 미스 반데어로에 대표작인 뉴욕 '시그램 빌딩'도, 이 제도 덕에 완공 30년 만인 1989년 랜드마크로 지정돼 과거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개발 논리 앞에 그간 우리는 무자비하게 추억을 지웠다. 단성사도, 피맛골도 잃었다. 또 없애고 나서 후회해선 안 된다. 윈스턴 처칠은 1943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 의회의사당을 다시 짓겠다면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다 부수고 나면 훗날 무엇이 우리를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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