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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군대는 왜 연전연패했을까?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태종 군대는 왜 연전연패했을까? 

                                               조선일보. 2022-02-03.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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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전 9승 36패 4무.

 

 조선군이 태종 재위 십팔년 동안(1400년 11월~천사백십팔년 8월) 여진 부족 및 왜구와 싸운 전투 결과다. '23전 23승'-정확히 말하면 '45전 45승'-이라는 이순신 장군의 전승(全勝) 기록에 익숙한 우리에게 9승 36패라는 통계는 충격이다. 

 

 설 연휴 동안 '태종실록'을 살펴보니, 조선군은 여진족과 여섯 번 싸워 고작 두 번 승리했다(승전율 33%). '왜(倭)' 혹은 '왜구(倭寇)'로 기록된 해적들과 벌인 전투는 더욱 참담했다. 태종 정부는 총 43번 침입한 왜구와 싸워 겨우 7번 승리하고 32번 패배했다(승전율 16%). 이 중에서 여진족을 상대한 전투 결과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구는 그 전부터 전투 능력에서 워낙 조선에 앞선 군대였기 때문

이다.

 

 여진족은 경우가 좀 다르다. 당시 여진족은 부족끼리 심각하게 싸웠고, 통합된 국가 체제를 이루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태종 군대는 1406년, 그리고 1410년 전반기 약 4개월 동안 여섯 차례 전투에서 여진족에게 대체로 패배했다. 두 차례 작은 승리가 있었지만(1차, 3차), 나머지 전투에서는 총사령관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면치 못했다. 전투 때마다 관군과 백성 수백 명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가장 아쉬운 점은 총사령관들의 지휘 미숙이다. 2차 전투 때 병마사 한흥보는 적 침입 정보를 사전에 들었지만 무시하고 있다가 허겁지겁 전투에 나서 전사했다. 4차 전투 때 병마사 곽승우는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는 적군 기병 두어 명을 쫓다가 사방에서 합세해 기습하는 복병을 만나 대패했다.

 

 물론 여진족은 태조나 세종·세조 시대에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태종 때처럼 "변방 백성들이 적을 두려워해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畏賊不能安業)"('태종실록' 10년 4월 23일)는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첫째, 당시 조선군에는 고려 말 활약했던 최영이나 이성계 같은 전쟁 영웅이 없었다. 여진족과 왜구를 두렵게 만들었던 영웅들은 혁명과 건국 과정에서 역적으로 처형되거나(최영), 왕 또는 공신으로 조정에 진출했다(이성계·이지란). 세종 때 '파저강 토벌'로 명성을 날리게 될 최윤덕 같은 장수는 순패(巡牌·순찰 패)를 달지 않았다고 감옥에 갇히거나, 명나라에 바칠 매를 잡으러 다녀야 했다. 그 결과 한흥보나 곽승우처럼 지휘 능력 없는 장수가 군대를 이끌었다.

 

 둘째, 태종 군대는 종래 강점이었던 '가병(家兵)의 충성심'을 확보할 수 없었다. 1400년(정종 2년) 1월 '박포의 난'을 겪은 조선 정부는 그해 4월 공신이나 왕자들의 '반란'을 막는 차원에서 사병을 혁파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사병 체제에서 정규군 체제로 조선군을 전환하는 한편, 중앙군을 강화시키려 했다. 

 

 국왕 호위를 전담하는 내금위를 설치했고(1407년), 궁중 숙위를 담당하는 갑사도 3000명으로 배가시켰다(1408년). 변방 지휘관의 재량권은 대폭 축소되었다. 말하자면 1410년 당시 조선군은 민병 체제에서 정규군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 있었고, 뛰어난 장군도 없었다. 그 점이 패인이었다.

 

 여진 부족에게 연패하던 1410년 즈음 태종 정부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실록을 보면 이즈음은 태종에게 '득의(得意)의 시절'이었다. 1405년부터 1407년 사이에 정치적 난제가 거의 다 해결되었다. 의정부 업무를 6조에 귀속시키는 관제 개혁을 단행했고, 한양 재천도를 마무리했다. 관료 중에서 왕을 도와 국가사업을 지지할 문신 재시험 제도(重試·중시)까지 도입했다. 

 

 국왕이 주도해 국정을 이끌어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왕의 언행을 제약하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부왕 이성계가 1408년 5월 서거했고, 그로부터 3개월 뒤 스승이자 장인인 민제까지 사망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등 언관들은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1408년 12월 '조대림 사건'이 계기였다. 왕의 둘째 사위 조대림을 조사하려다 자칫 죽을 뻔한 

대사헌 맹사성을 본 언관들은 국왕 뜻 거스르기를 꺼렸다. 거스르기는커녕 국왕이 "불령(不逞)한 

무리"라고 좌표를 찍으면 언관들은 공격하기에 급급했다. 공안 정국이 계속되면서 직언하는 풍토

마저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1410년 조선군의 연패는 태종에게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 정치 성공이 결코 대외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 냉정한 현실 직시가 태종 후반 국방 정책을 변화시켰다.

 

 재위 중반부 태종실록을 읽으면서 떠오른 낱말은 '휴브리스(hubris)'다.

 뛰어난 리더들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독선적 태도를 보이다가 실패하는 이 현상에 직면했던 태종은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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