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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이육사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이육사 

                                                          조선일보. 발행일 : 2022.02.03.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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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든 기자로, 총 든 시인으로… 日帝 항거해 17번 투옥됐죠.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은 최근 이육사(1904~1944) 시인이 남긴 유일한 서명을 그가 별세한 지 78년 

만에 확인했다고 밝혔어요. 이육사가 소장했던 한 책의 속표지에 쓰인 서명이 누구의 것인지 해독할 수 없었

는데, 좌우를 뒤집어 봤더니 이육사의 다른 이름인 이활(李活)이란 글자가 보였다는 것이죠.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었고 '이활'이란 이름도 썼어요. '육사'는 그의 호(號·본명 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해 지은 이름)였죠. 그는 왜 이런 이름을 지어 썼던 것일까요?

 

호의 뜻, '죽이고 싶도록 치욕스러운 역사'

 

 '오! 먼 길에 지친 말/ 채찍에 지친 말이여!/.../ 새해에 소리칠 흰 말이여!'

 1930년 1월 3일 자 조선일보에는 '말[馬]'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실렸어요. 당시 26세였던 이육사의 첫 작품이었습니다. 시에 등장한 '말'은 바로 일제 식민 통치에 신음하던 조선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었죠.

 

 이육사는 시인이자 투사였고, 독립운동 가이자 신문기자로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안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신학문을 동경해 도쿄와 베이징에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투신해 일제에 의해 17차례나 투옥되는 등 그의 경력 대부분은 항일 운동으로 채워져 있죠.

 

 스물한 살 때1925년. 그는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의열단은 무장 

독립운동을 펼치던 곳이었습니다. 그가 의열단에 가입한 배경에 대해선 '친가의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 더해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외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 때 이육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당시 수인(옥에 갇힌 사람) 번호가 '264'였다고 해요. '육사'라는 호는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 '戮史(육사)'라는 한자를 붙였습니다. '육'은 죽일 육(戮) 자입니다. 나라 잃은 민족의 역사가 치욕스러워 죽이고 싶었다는 것이죠. 그 뜻이 너무 거칠다는 집안 어른의 권고로 나중엔 뭍 육(陸)을 쓴 '陸史(육사)'로 바꿨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입사해 기자로 활동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육사의 다음 행보는 신문기자였습니다. 조선일보에 입사해 대구지국을 경영하고 기자로도 근무하면서 '육사생'이란 필명으로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신진 작가 장혁주 군 방문기' 등의 기사를 썼죠.

  

 1934년에는 조선일보 본사 소속으로 대구 특파원에 임명됐습니다. 신문사를 나온 뒤에도 1940년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할 때까지 꾸준히 지면에 글을 발표했습니다.

 

 시 '절정'에서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라고 했던 것처럼, 1932년 4월 이육사는 항일 운동을 위해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의열단 수장인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들어갔던 겁니다. 폭탄 제조법과 투척법, 피신과 변장, 무기 운반 등을 배웠고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총을 든 시인'이었던 것이죠.

 

 시인 신석초(1909~1975)는 이육사가 "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 상냥하고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를 가졌다고 회고합니다. 이 때문인지 그가 당시 무장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고 합니다. 1933년 귀국한 그는 1934년 일제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는데, 이때 촬영한 사진이 붙은 형무소 신상 카드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백마 타고 올 초인'을 기다리며

 

 이육사가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해 본격적인 시를 짓기 시작한 것은 1937년입니다. '청포도' '절정' 

'광야' 같은 유명한 시가 이 무렵 발표됐죠. 이육사에게는 시를 쓰는 것 역시 저항의 일부였습니다. 극한의 상황에 있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의지가 그의 시 곳곳에 잘 드러나 있죠. 역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이육사의 시에 대해 "조국에 닥친 피의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사무친 진정성에서 나온 혁명 

문학"이라고 평가합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시 '청포도'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라 읊습니다.

 

 청포(푸른 도포)를 입은 손님이란 조국 광복과 평화를 상징한다고 여겨지는데, 청포는 당시 중국에서 비천한 사람들이 입던 옷이자 망명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일상복이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시 '절정'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마지막 구절로 유명하죠. '강철 무지개'란 칼 같은 기세로 일제 침략자들을 찌르는 행동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육사 시 중에서 가장 웅장한 스케일이 돋보이는 '광야'는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노래합니다. 나라를 빼앗긴 극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더라도, 끝내 잃어버리지 않을 민족의 정신을 부르짖는 것 같습니다.

 

 이육사는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잠시 귀국했다가 또다시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고, 1944년 1월 16일 감옥에서 순국(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했습니다. 그는 한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가을에도 아예 유언을 쓰려 고는 하지 않소.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시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오."

 

[우리나라의 저항 시인]

 

 우리나라의 근대 문인 중 일제 침략에 맞선 '저항 시인'으로 꼽히는 사람들은 이육사 외에도 한용운(1879~1944), 이상화(1901~1943), 심훈(1901~1936), 윤동주(1917~1945) 등이 있습니다.

 

 '님의 침묵'을 쓴 한용운은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를 맡았죠.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도 숱한 체포와 고문을 겪었습니다.

 

 시 '그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를 썼던 심훈시 3·1 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저항 작가였죠. '서시' '별 헤는 밤'의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돼 옥사했는데, 일제가 저지른 생체 실험의 희생였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조국 광복 직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화는 1943년 4월, 이육사는 1944년 

1월, 한용운은 1944년 6월, 윤동주는 1945년 2월 별세했어요.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들이 그렇게도 

꿈꾸던 광복(1945년 8월 15일)을 볼 수 있었을 것이기에 안타까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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