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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뛰었건만, 경주마 50%는 서글픈 마침표

죽어라 뛰었건만, 경주마 50%는 서글픈 마침표 

                                                                  조선일보. 2022-02-11. 곽창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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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태로 본 '말의 경제학'

 

지난달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등장했던 말이 촬영장에서 사망했다. 이 말 이름은 '까미'. 한때 과천 경마장 일대에서 열심히 달린 경주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고, 은퇴한 뒤 드라마 촬영 등에 필요한 말을 빌려주는 업체에 팔렸다. 그렇게 '태종 이방원' 촬영에 동원됐고, 배우가 말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찍다가 고개가 땅에 부딪혀 꺾이는 바람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사람 운명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말도 저마다 운명이 다르다. 경마장 일대를 호령하다 화려하게 은퇴한 뒤 

제주도에서 요양하며 지내는 말도 있는가 하면, 타고난 것보다 훨씬 일찍 저승길로 가는 말도 있다. 

이들 운명은 어떻게 갈릴까. 

 

왕 대접 받는 극소수 은퇴 경주마

 

 작년 12월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에서 한 경주마의 은퇴식이 열렸다. 이름은 '실버울프'. 이 말은 2013년 태어나 2015년 경주마로 데뷔했다. 2021년 은퇴할 때까지 37전 17승을 기록했다. 거둬들인 수입만 30억9000만원에 이른다. 경마 업계 종사자들은 '여제(女帝)'라 했다. 은퇴식에서는 과거 실버울프가 경마장에서 힘차게 달리는 영상이 상영됐다. 

 

 현재 제주도에서 휴양 중인데, 이달부터 새끼를 낳는 어미 말로 변신할 예정이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어미의 훌륭한 혈통을 이어받은 경주마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이 은퇴식을 갖는 것은 한국마사회 규정에 따른 것이다. 경주마는 보통 두 살에 선수로 데뷔해 대여섯 살 정도가 되면 은퇴한다. 규정에 따르면 은퇴 경주마의 과거 우승 경력 등을 따져 세 가지 등급에 해당할 경우 은퇴식을 열어준다. 실버울프는 둘째로 높은 등급을 받았다. 코로나 발발 이전만 해도 둘째 등급을 받은 은퇴 경주마 주인은 500만원 상당 기념품(금 열쇠)을 받았다.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성적을 남기면 1000만원에 이르는 기념품을 받을 수 있었다.

 

절반은 은퇴 후 도축

 

 그러나 실버울프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마사회에 따르면 은퇴식을 치르는 경주마는 매년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성곤 의원실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에서 매년 평균 1391마리가 경주마로 뛰다 은퇴했다. 이 중 30%(422마리)는 승마장에서 사람을 태우는 용도로, 12%(166마리)는 번식용으로 변신했다.

 

 이렇게라도 '제2의 생'을 이어가는 건 운 좋은 경우다. 이런 기회를 얻지 못하는 말은 대부분 은퇴 직후 강제로 생을 마감당한다. 마사회 관계자는 "제대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말을 유지하는 데 한 달 100만원 넘게 든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말 주인 처지에서는 도축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까미는 건강하고 성미가 온순해 은퇴 후 촬영용으로 '전직'한 운 좋은 케이스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부주의한 촬영 진을 만나 불의의 죽음을 맞은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마에서 퇴출된 말의 처우를 놓고 학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2019년 '페타(PETA)'라는 미국 동물 보호 단체는 제주도의 한 도축장에서 학대당하는 말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영상에는 도축 업자들이 막대기로 말의 얼굴을 내리치는 장면과 겁에 질린 말들의 모습 등이 담겼다.

 

 이 단체는 당시 "10개월간 은퇴한 경주마 22마리가 도축되는 것을 확인했다"며 해당 도축장을 관리하는 제주축협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외국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영국 BBC방송은 지난해 7월 동물 보호 단체가 영국 한 도살장에 은밀하게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경주마들이 서로 지켜보는 가운데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고발했다. 이 방법으로 도축한 경주마 중에는 과거 경마 대회에서 우승한 말도 있었다. BBC는 "동물 학대 외에 문서 위조 같은 방법으로 오염된 말고기를 시장에 유통시키려던 시도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력 관리하지만, 은퇴하면 추적 어려워

 

 은퇴 경주마 학대 논란이 커지자, 한국마사회는 '말 복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시행 중이다. 

 말에게 고통이나 불편함을 주는 요소를 제거하고, 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력제'를 시행한다는 

게 골자다. 이력제란 경주마의 출생부터 사육·조련·유통·이용·사망 등의 정보를 등록하는 제도다. 

손톱만 한 마이크로 칩에 경주마의 각종 정보를 담은 뒤 목 부위에 심으면 정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경주마 주인이 은퇴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마사회에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면 추적이 

어렵다. 실제 경주마 가운데 은퇴 이후 정확한 용도가 파악되지 않은 경우는 2016년 70마리에서 2020년 

308마리로 늘었다. 이렇다 보니 은퇴한 경주마가 학대당하거나 잔인하게 도축돼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태종 이방원 촬영으로 사망한 '까미'도 경주마 시절 이름이나 정확한 경력이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마사회 

관계자는 "과거 마사회에 '까미'라는 이름의 경주마가 등록된 적이 없다. 은퇴 후에 붙인 이름으로 추정된다"며 "이미 폐사돼 마이크로 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말 대부분이 은퇴 후 학대받거나 불법 도축되는 근본 원인현대사회에서 말이 경마용 외에는 뚜렷한 쓰임새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해 제주특별자치도는 경주마를 도축해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 사료로 이용할 수 있는지 한국축산경제연구원에 용역을 맡겼다. 보고서는 "말고기를 활용한 펫푸드(반려동물 사료) 시장은 경제적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펫푸드 시장과 차별화된 고급 시장이 타당하다"

고 결론 내렸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동물 보호 단체가 제주에서 시위를 벌였고, 제주도는 결국 추진을 포기했다. 동물자유연대 정진아 팀장은 "말 수명은 30년이나 되는데, 인간이 쾌락을 위해 고작 두 살에서 다섯 살 때까지 실컷 이용하고 나서 쓸모없다고 잔인하게 도축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그래픽] 경주마 은퇴한 이후의 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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