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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우크라이나의 비극… 민족은 있는데 나라는 없었다

천년 우크라이나의 비극… 민족은 있는데 나라는 없었다 

                                                                   조선일보. 2022-02-19. 양지호 기자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구로카와 유지 지음|안선주 옮김|

글항아리|296쪽|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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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곡가 차이콥스키, 문필가 도스토옙스키와 고골, 발레리노 니진스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우크라이나 

혈통이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영토가 넓다. 비옥한 흑토지대 덕분에 '유럽

의 빵 바구니'로도 불린다. 하지만 풍요로운 천연자원이나 유구한 문화적 전통이 정치적 독립과는 별개

라는 점이야말로 우크라이나 비극의 근본 원인이다.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복잡다단한 이 땅의 역사를 간결하면서도 충실하게 전하는 책이

다. 일본의 주(駐)우크라이나 대사 출신인 저자는 "우크라이나 역사의 최대 주제는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썼다. 

 

 실제로 우크라이나는 20세기에만 독립 선언을 6차례나 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성공한 건 소련 해체 당시

인 1991년 마지막 독립 선언뿐이다. 그래서 제대로 된 독립국으로서의 역사는 소련 해체 이후 고작 30

여 년에 불과하다.  

 

 과연 이웃 대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한 가족일까. 민족·종교적 유사성은 분명 존재한다. 같은 동슬라

브 민족이고 정교회를 믿는다. 두 나라 모두 9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키예프 루스 공국(882~1240)을

기원으로 삼는다는 점도 같다. 

 

 하지만 언어·문화·관습이라는 점에서는 차이점도 적지 않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한다.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대장 부리바'로 친숙한 군사적 자치 공동체인 '코사크' 부대 역시 오늘날의 우크라

이나 지역에서 기원했다. 

 

 15세기 무렵부터 코사크 부대는 이 일대에서 잇따른 전투에 참여하며 용맹함을 과시했다. 우크라이나가 

18세기 오스트리아·러시아 제국에 분할 점령된 이후에도 독자적 민족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저자는 "동슬라브의 종가(宗家)는 지금의 우크라이나였으나 몽골 침략으로 쇠퇴하고 말았고, 

 

 분가(分家)에 해당하는 모스크바가 대두하며 루스(러시아·루스인의 땅)라는 이름까지 빼앗아갔다"고 한다

20세기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면서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성을 러시아가 계승했다는 것이 뒤늦게 

정설이 됐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비극적 관계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폴란드의 지배 아래 있던 우크

라이나 코사크 부대는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 뒤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는다. 조약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저자는 "이 조약이 우크라이나 역사의 전환점이 되어 그 이후 러시아에 병합되는 첫걸음이 됐다"고 한

다. 

 

 이 협정 이후 러시아 황제 차르의 칭호도 '전(全) 러시아의 차르'에서 '모든 대러시아(러시아) 및 소러시

아(우크라이나)의 차르'로 변한다. 오늘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고토(古土)'라고 주장하는 근거

가 되고 있다. 

 

 1차 대전 이후에도 독립 기회는 있었다. 당시 동유럽에는 신생 독립국들이 출현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승전국 미국의 민족 자결주의에 기대를 걸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서 독립을 호소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패전국 독일의 재부상을 막으려 폴란드의 서우크라이나 병합을 사실상 용인한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냈지만 독립을 인정받지 못한 우리의 역사와도 상통한다.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계속된다. 러시아의 침공 임박설이 쏟아지자 17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는 영국·폴란드와 3자 협력을 통해 러시아에 맞서 "동유럽 민주주의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300여 

년 전 러시아 지배의 빌미를 제공했던 폴란드와 다시 손을 잡는 얄궂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슬라브어 어원을 따지면 우크라이나라는 국명은 '변경 지대'(러시아의 주장) 또는 '국가'(우크라이나의 주장)

라는 뜻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군사적·외교적으로 자립할 능력을 갖추지 못할 때 전략적 요충지는 언제든 강대국

들이 격돌하는 장기판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을 견제하는 러시아, 국내 사드(THAAD) 배치를 견제하는 중국. 두 대

국의 셈법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역사를 러시아사(史)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일삼는다. 동북아의 

교차로에 있는 우리 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과거와 현재는 반드시 검토해야 할 최악의 시나리오일 수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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