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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2)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④ 평양에서 기생파티 벌인 청나라 군사 

                                                      조선일보. 발행일: 2022.02.23. 박종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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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 부패의 바다에 침몰하다

"그때 제 말씀을 들으시지…."

 

 1895년 3월 20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과 일본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일본 시모노세키 연회

장 춘범루 1층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여전히 진행 중인 청일전쟁을 끝내고 강화조약을 맺겠다는 자리

다. 

 

 대화 내용은 청나라 (이하 중국) 측 '馬關議和中日談話錄 (마관의화중일담화록)'과 일본 '일본외교문

'(28권 2책, p383, 1089.일청강화조약체결 '3월 20일 회견요록')에 기록돼 있다. 의례적 인사말이 오가고 

이토가 이홍장에게 이리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 "10년 전 중국이 개혁해야 한다고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이런 모습으로 

재회하니 유감입니다." 

 

 이홍장: "대신께서 중국이 나라가 넓고 사람이 많아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하셨거늘, 참괴합니다."

 

 10년 전인 1885년 4월 두 사람은 조선에서 벌어진 갑신정변 사후 처리를 위해 중국 천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북양함대를 창설하고 욱일승천을 예고하던 나라였다. 이후 서태후 측근 수구 

세력은 북양함대 군비(軍費)를 1894년 다가올 서태후 환갑 축하용 토목공사에 전용했다. 북양함대는 

군함 한 척도 증강하지 못했다. 

 

 국가 공동체를 위해 사용할 돈을 전용해버린, 부패(腐敗)다. 일본은 천황부터 하급 사무라이까지 광적

일 정도로 서구화에 몰두한 끝에 그 중국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고, 천하를 붕괴시켰다. 바닷속으로, 

부패의 바닷속으로 중국이 침몰했다. 다음은 그 부패가 전쟁터에 뿌려댄 패전의 흔적들이다. 

 

1894년 가을, 평양 기생 파티

 

 미국 '뉴욕 월드'지 기자 제임스 크릴먼(Creelman)은 일본군을 따라 청일전쟁에 종군한 기자였다. 

 종군 초기 '야만과 문명의 군사가 충돌했다'라고 보도할 만큼 친일적이었지만, 크릴먼은 여순(旅順) 

함락 후 일본군이 벌인 학살극을 보도한 객관적인 기자였다. 

 

 그가 조선 평양에 도착했을 때, 평양은 중국군이 구축해놓은 15피트(약 4.6m) 높이 성벽에 에워싸여 

있었다. 크릴먼은 "저 기적 같은 공병 작업을 완수한 군대가 어떻게 요새에서 쫓겨날 수 있었을까" 하고 

의문을 던졌다. 의문은 입성 후 취재를 통해 저절로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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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선발대가 황주에 도착했을 때 부대장은 평양에서 5마일 떨어진 산에서 적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깃발을 펄럭이고 북과 나팔이 도발적인 소리를 내뿜었다. 일본군이 이 선발대에 접근하는 동안 

중국 장군들은 평양에서 무희(舞姬)들과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평양 여자들은 기품 있는 미모로 아시아에 유명하다. 낮 동안 중국군 위용은 장관이었다. 밤이 되면 중국군

은 흥청댔다. 병사들은 민가에 침입해 아내와 딸들을 겁탈했다. 장군들이 술에 취해 있는 동안 도시 전체가 

약탈당했다. 지옥문이 열린 듯했다(Hell seemed to be let loose). 겁에 질린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

들판과 숲속으로 달아났다. 많은 사람이 굶주림과 노숙 생활로 죽어갔다.' 크릴먼에 따르면 살아남은 

주민들은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모두 돌아왔다.(J. 크릴먼, 'On The Great Highway', 로드롭 출판, 

보스턴, 1901, p36)  

 

 훗날 그 성벽은 '중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42일 동안 17세에서 50세에 이르는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

해 만든 시설'임이 밝혀졌다.(제노네 볼피첼리, '구한말 러시아 외교관의 눈으로 본 청일전쟁', 유영분 역, 

2009, 살림, p192~193) 조선인이 부역에 동원된 사이 중국군은 '바짝 군기가 든 멀쑥한 일본 전사들이 

단추를 꽉 채운 유럽식 군복을 착용하고 그들을 파멸시키려고 행군 중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크릴먼, 앞 책, p38) 

 

 전투를 목전에 두고 장교들은 평양 기생을 끼고 술판을 벌였고 병사들은 '장엄하게 싸우다가 어느 순간 

군복을 찢어버리고 무기를 던지며 겁에 질린 동물들처럼 도주했다.' 

 

 그 풍경은 1891년 일본 히로시마 구레(吳)에서 북양함대 정원호 병사들이 '치렁치렁한 소매가 달린 

군복과 1리만 걸어도 포로가 될 판인 헐렁거리는 군화'(馮靑, '中國海軍と近代日中關係', 錦正社, 

2011, p43)로 예언해준 그대로였다. 서른다섯 먹은 미국 기자 크릴먼은 이렇게 기록했다. '군사과학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요새 하나를 무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살상 기계 뒤에 훈련된 

두뇌와 눈과 육체가 없다면 헛된 것이다.' 

 

 전투 개시 하루 만인 1894년 9월 16일 새벽 평양이 일본군에 함락됐다.

 1593년 2월 9일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에서 쫓겨난 

지 301년 만이었다. 

 

모래 가루 가득한 중국 포탄

 

 9월 17일 압록강 앞바다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과 일본 양국 최첨단 군함이 총출동해 전쟁을 

벌였다. 북양함대 사령관 정여창(丁汝昌)은 지조가 굳은 군인이었다. 하지만 해전 경험은 없었다. 일반 

병사는 문맹이 대다수라 무기에 대한 숙지가 없었다.(李元鵬 外, '晩淸近代化軍事改革的悲歌', 軍事歷史 

2014(03), 軍事科學院軍事歷史和百科硏究部)  

 

 중국 14척 대 일본 12척. 숫자로는 중국이 우위였지만 실질은 반대였다.

 개전 전 대일 우위를 위해 이홍장이 요구했던 속사포는 단 1문도 장착되지 않았다. 중국 함대는 분당 

32.8발을 쏴 3.28발을 명중시켰고 일본 함대는 193.3발을 발사해 28.9발을 명중시켰다. 날렵한 일본 

전함들이 새카맣게 만들어놓은 저 탄막 속에서 북양함대는 우왕좌왕했다. 북양함대 군함 다섯 척이 

격침됐다. 일본군은 한 척이 침몰하고 두 척이 대파됐다. 

 

 전투는 저녁 무렵 끝났다. 남은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귀항한 뒤 남쪽 위해위(威海衛) 기지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陳偉芳, '청일갑오전쟁과 조선', 권혁수 역, 백산자료원, 1999, p208) 

 

전투가 끝나고 보니 이상한 일이 또 벌어져 있었다. 중국 군함이 발사한 많은 포탄이 '폭발하지 않은 채' 

그대로 선내에서 발견됐다. 포탄은 폭약 대신 '모래와 진흙, 석탄 가루가 채워져 있었다.' 이미 풍도해전

에서 그런 공갈탄을 경험한 일본 순양함 요시노호(吉野號)는 이번에도 큰 타격 속에 무사히 귀환했다. 

 

 일본군은 중국 경원호와 치원호를 어뢰 한 방에 침몰시켰다. 이듬해 초 벌어진 위해위 해안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어뢰 공격으로 정원호와 래원호, 위원호를 침몰시키거나 대파했다. 중국 함대는 평시 훈련 때 

미리 거리를 재고 부표를 설치한 뒤 좌표대로 사격해 명중시키는 겉치레 훈련만 했을 뿐이다.(游戰洪, 

‘德國軍事技術對北洋海軍的影响’,中国科技史料 19권(04), 清華大科學技術史暨古文献研究所, 1998, 

北京)  

 

 11월 21일 북양함대 전략지인 여순항이 함락됐다. 해를 넘기며 계속된 육지전에서 중국군은 전패했다. 

 1895년 2월 11일 북양함대 사령부인 위해위가 함락됐다. 

 

 일본 육군이 기지 서쪽과 남북 기슭을 포위하고 해군이 항구를 공격했다. 사방에서 쏴대는 십자포화에 

북양함대는 말 그대로, 궤멸됐다. 정원호를 지휘하던 정여창은 그날 밤 마약을 먹고 자살했다. 반파 상태

로 정박 중이던 정원호는 자폭했다. 다음 날 북양함대는 항복했다.(陳偉芳, 앞 책, p226) 

 

 일주일 뒤인 2월 19일 위해위를 함락한 일본군 제2군이 위해위 대성전(大成殿)에서 승전 파티를 열었

다. 대성전은 봉건 중국을 정신적으로 지배한 공자를 모신 사당이요 중화 천하의 상징이었다. 부패가 낳은

절대적인 전력 열세와 근대정신에 대한 안이함이 낳은 결과요, 근대가 전(前)근대를 접수하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시모노세키에서 일흔셋 먹은 늙은 이홍장이 쉰다섯 살짜리 일본 대신에게 "참괴하다"라고 

후회한 것이다. 그 참극은 그림자가 매우 짙었다. 위해위가 함락되고 며칠 뒤 누군가가 일본군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귀군이 획득한 군함 가운데 '광병호(廣丙號)'는 북양함대가 아니라 

광동성 소속이니 반환해달라." 당대 개화 지식인 양계초(梁啓超)는 이렇게 평했다. "실로 이는 (찢어진) 

중국 각 성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청일전쟁은 일본과 이홍장 한 사람의 전쟁이었다."

(양계초, '이홍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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