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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그린 120년 전 전염병 세상

노벨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그린 120년 전 전염병 세상 

                                                                  조선일보. 2022-03-12.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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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부터 역병 소설 구상, 코로나 창궐 후 수정 작업 끝내 페스트 퍼진 오스만 제국 배경… 

"국가 잘못 아냐" 변명하는 총독 늑장 대응·초기 사실 왜곡 등 현대와 같은 패턴 묘사해 꼬집어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이난아 옮김|민음사|780쪽|1만9000원

 

 이 시대 문학의 최전선에 선 거장이 인류 공동의 난제 팬데믹을 다뤘다.

 노벨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과 '역병'이라는 초미의 관심사가 만났다는 자체만으로도 화제성 충만한 

작품. 그가 전염병을 소재 삼은 건 계획된 만남이었으나 코로나와의 만남은 조우(遭遇)였다. 

 

 파묵은 30여 년 전부터 역병 소설을 염두에 뒀다가 6년 전쯤 집필에 들어갔다.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코로나가 창궐해 수정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작품은 액자소설 형식을 띤다. 화자역사학자 겸 소설가 미나 민게를리. 110여 년 전 오스만 제국의 

공주 파키제(술탄 압뒬하미트의 조카딸)가 언니에게 보낸 편지를 바탕으로 2017년 펴낸 소설이라는 

설정이다. 

 

 "이 책은 역사소설인 동시에 소설 형태로 쓴 역사다." 화자를 통해 뱉은 책의 첫 문장은 파묵의 의도를 

대신한다. 

 

 오스만 제국이 침몰하던 1900년대 초반 역사적 사건과 작가적 상상이 이음매 없이 매끈하게 이어져 

웅장한 서사를 자아낸다. 

 

 배경은 1901년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동지중해 가상의 섬 민게르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딱 절반씩 

사는 작은 섬이다. 파묵이 천착해온 동·서양 문명 충돌, 이슬람·기독교 간 갈등과 더불어 팬데믹으로 

인한 고립을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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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섬에 페스트가 퍼지자 압뒬하미트는 황실의 유능한 기독교도 방역 전문가(본코프스키)를 파견한다. 

 하지만 그는 방역 정책을 채 펴기도 전에 살해된다. 술탄은 다시 실력 있는 무슬림 방역 의사이자 파키제

의 남편 누리를 급파한다. 그의 임무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고 페스트를 종식하는 것이다. 

 

 현실은 바이러스보다 고약하다. 민게르 총독은 무능하고, 사람들은 생계가 더 중요하다며 격리를 거부

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는 서로 역병의 온상이라며 대립한다. 페스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종교·

정치 음모까지 맞물리며 대혼란에 빠진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였기에 술탄의 관심을 받던 섬은 졸지에 버리는 카드가 됐다. 

 술탄은 역병 확산을 염려하는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해 민게르 섬을 봉쇄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독자 생존해야 하는 상황. 섬 출신 장교(콜아아스)가 독립국을 선포하며 대통령에 오르지만 그 역시 페스

트의 희생양이 돼버린다. 

 

 "소설은 우리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 경험인 것처럼 쓰는 기술

에 바탕을 둔다." 소설 속 문장처럼 파묵이 그려낸 120년 전 이야기는, 코로나 시대 자화상에 습자지 대고

따라 그린 듯 닮은꼴이다. 

 

 거리 두기와 집합 금지로 교회와 사원을 봉쇄하자 신도들은 종교야말로 절망의 시대에 유일한 구원이

라며 반발한다. 코로나 발원을 외부로 돌리는 지금처럼 민게르 주민은 바다 건너온 방역 전문가들이 바이

러스를 몰고 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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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 현실 부정, 뒤늦은 방역으로 인한 혼란'이라는 패턴도 똑같다.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던 총독은 수세에 몰리자 "페스트는 국가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급기야 "어려운 시기에 때로는 국민의 마음을 사기보다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더 유용할 수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파묵은 2020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역사와 문학사를 관통해 팬데믹이 비슷한 양상을 보여온 이유는 

세균과 바이러스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같은 패턴의 초기 대응 때문이다. 

 

 초기 대응은 언제나 현실 부정이다. 정부는 늑장 대응하고, 현상을 왜곡하고 수치를 조작해 발병 사실

을 부인한다"고 꼬집었다. 

 

 "(술탄이 방역의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염병 차단이 아니라 소문을 차단하는 것" "방역관의 업무는 단지 

무력으로 규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규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것"…. 

 곳곳에 'K 방역'의 허상을 짚어보게 하는 문장이 박혀 있다. 

 

 30년 묵힌 소재인 만큼 작가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정교하게 이야기 성을 쌓았다. 발췌독 했다간 흐름

을 따라잡을 수 없어 되감기해야 한다. 거장의 공력(功力)에 경외감마저 든다. 

 

 표지는 스물두 살 때까지 화가를 꿈꾼 파묵이 책을 준비하며 직접 그린 그림. 780쪽 벽돌책 등반을 끝낼 

무렵 파묵은 팬 서비스처럼 슬쩍 자신을 등장시킨다. 힌트는 여기까지. 완독한 이들만 맛볼 달콤함은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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