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19회 때 모교 생활과 2021년도의 과학 기술 발전 비교 (4부)
<글이 이어져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시작합니다!>
롯데월드타워도 새로운 공법을 이용하여 건축되어졌지만, 6년 이상이 소요되어 지워진 123층
짜리 마천루이다!
<사진 출처 / SBS News에서 / "롯데월드타워에 폭발물…빨리 신고하라" 거짓말로 징역형 | SBS 뉴스
롯데월드타워(영어: Lotte World Tower[1][2][3])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롯데월드몰 단지 내에 위치한 마천루이다.[4][5][6]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마천루로 2010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2015년 12월 22일 123층까지 상량 완료했으며, 2016년 3월경 첨탑공사가 완료됨으로
써 외장 공사가 완료되었고, 2016년 12월 22일에 완공되었다.[7][8][9]
2017년 4월 3일에 오픈했다.[10][11][12] <이하 위키백과 사전 참조> 건축가는 콘 페더슨 폭스,
구조공학은, 레슬리 얼로버트슨, 엔지니어링 서비스는 시스카 헤네시 그룹, 관리는 롯데건설,
리프트 공급 업체는 OTIS 엘리베이터 회사다.
총 공사비는 약 3조 8000억원이고, 현재까지 연인원 약 77만 6천여명이 공사인원으로 투입됐다. 2015년 9월 기준 롯데월드타워에 투입된 콘크리트 양은 약 19만 5천m3다.[라] 사용된 철골과 철근은 각각 4만톤이 넘는다.[마]
'한국 건축 기술의 집약체'로 불리며, 공사에 참여한 국내 건설사 및 직원들이 초고층 건설기술
을 습득해 향후 해외 초고층 건축 수주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으로는 주요
건축 기술을 모두 외국 회사가 맡아 국내 건축업계의 한계성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있다.[19][20]
롯데월드타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동시에 전 세계에서 2021년 기준으로 5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202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에 골딘 파이낸스 117과 말레이시아에 KL118이 완공
되어서 7위로 밀려날 예정이다. <위키백과 사전 참조>
황학동 정문을 곧장 지나 본관 건물 좌측에 있는 곳에는 자동차과 동문님들이 공부하고 실습하던 작업장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운동장에서 자동차 바퀴를 유지하는 철 뼈대 위에 엔진과 운전석만 있는 자동차로 실습을 하는 장면도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우리가 1970년도에 배웠던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그러한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증기 기관을 사용한 교통수단의 시도 중 가장 앞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리처드 트레비딕의 페니다렌 광업용 궤도용 증기 기관차로, 180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1814년 조지 스티븐슨이 현재의 여러 기관차들과 유사한 특성을 가진 블뤼허(Blücher) 호를 만들었으며, 영국에서의 증기 기관차의 개발 이후, 미국과 유럽의 각 국 역시, 초기에 영국제 기관차로 시작하여, 점차 자국 사정에 맞는 고유의 구조와 형상으로 발전해 가기에 이른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2~5축의 동륜과 수 개
의 종륜에 백 톤 내지 그 이상의 자중을 가지며, 수 백 마력의 힘으로 여객과 화물을 수송하기에
이른다.
<사진 출처 / 산업 혁명의 두 번째 단계 - 보편적 인 엔진의 도입 [1965 Kudryavtsev P.S., 남부 동맹 I.Y.- 물리학 및 기술의 역사. 교육학 기관의 학생들을위한 교과서] (physiclib.ru)
1935년에 등장한 독일의 BR05형 증기기관차는 최고속도 200.4km/h를 달성한 바 있으나, 그러나 2차 대전은 이러한 증기 기관차의 발전 경쟁을 중단시켰으며, 1912년 경에 등장한 디젤 기관차는 점차 증기 기관차의 입지를 침식해 가기에 이른다.
증기기관차는 1950년대를 정점으로, 점차 일선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여 1970년 이후로 주요 산업국가에서 증기기관차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되었다. <위키백과 사전 참조>
<사진 출처 / 모가형 증기기관차 (thewiki.kr)
(産業 革命, 영어: Industrial Revolution)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약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manufacturing process)으로의 전환,이로 인해 일어난 사회, 경제 등의 큰 변화를 일컫는다.
섬유산업은 현대의 생산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산업 혁명은 후에 전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를 크게 바꾸어 놓게 된다. 산업 혁명이란 용어는 1844년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The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England》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아널드 토인비가 1884년 《Lectures on the Industrial Revolution of the Eighteenth Century in England》에서 이를 보다 구체화 하였다.><위키백과 사전 참조>
헨리 포드(영어: Henry Ford, 1863년 7월 30일 ~ 1947년 4월 7일)는 미국의 기술자이자 기업인으로 포드 모터 컴퍼니의 창설자이다.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서쪽의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2살이 되던 해에 지병을 앓고 계신 위독한 어머니를 위해 말을 타고 이웃 도시로 달려가긴 했지만, 아무리 빨리 달려도 줄어들지 않는 거리 때문에 그가 어머니 곁에 도착했을 때 이미 어머니는 숨을 거둔 뒤였다. 15세가 되던 해에 학업을 접고 기계공이 되어 최고의 발명가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 회사에서 기술 책임자로까지 일을 하다가 1903년 퇴사 후, 그의 나이 40세에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 '포드'를 설립하게 된다. 기업경영자로서 그가 일궈낸 것은 1. 동일한 생산 공정을 반복하는 '표준화' 2. 각자 자신이 맡은 부분만 담당하는 '분업화' 3.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전문화' 이었고, 회사 설립 후 그가 노동자들에게 내건 파격적인 조건은 '1일 8시간 노동에 최저 임금 5달러'등의 목표를 세웠다. 농업 노동의 합리화를 위한 운반의 개선을 위해 기계기사를 지망, 디트로이트의 작은 기계 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서 기술을 배웠다. 5년 후 고향으로 귀농한 그는 농사를 돌보면서 공작실을 만들어 연구를 계속하였고, 1890년에디슨 조명 회사 기사로 초청되어 근무하던 중 내연 기관을 완성하여 1892년 자동차를 만들었다.
<사진 및 아래 글 출처 / 헨리 포드(Henry Ford) | 워싱턴 하늘비전교회 Heavenly Vision Community Church (mdkumc.org)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디트로이트’로 가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회사 의 직공으로 들어갔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다.
헨리 포드는 점점 인정을 받았다. 그러한 그가 한번은 에디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에디슨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디슨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소.”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고 2년, 3년이 지났으나 실패했다. 다시 5년,6년이 지났으나 또 실패했다. 7년, 8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드디어 13년만에 헨리 포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야 말았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실패의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좌절하지 않는다. 꾸준히 목표 를 향해 달려간다.
* 이곳에 게재한 사진과 기사 (글) 등은 어떤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 아님과
동시에 저작권 침해 의사가 없음을 밝혀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