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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향한 광기… 가족까지 없애며 차지한 왕권, 2년 만에 끝났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0) 권력 향한 광기… 

                                   가족까지 없애며 차지한 왕권, 2년 만에 끝났다

                                        조선일보. 발행일: 2022.02.22.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영국의 폭군 리처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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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전쟁(1455~1485)은 이름만큼 그렇게 낭만적인 사건이 아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영국

으로 돌아온 전사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다시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다 자멸한 말세의 전투

라는 평가가 실상에 가깝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처드 3세는 지옥 같은 막장 정치판에서 악마의 광대 노릇을 

하다가 처참하게 몰락한 인물이다.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헨리 6세다. 백년전쟁이 끝난 1453년, 국왕의 정신병이 크게 악화

었다.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국왕의 조카뻘인 요크 공작이 국왕을 보호하는 척하다가 그 자신이 왕위를 탐

하면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흰 장미) 간 전쟁이 시작되었다. 

 

 사실 30년 내내 전투가 지속된 건 아니고 군인 수천 명이 짧은 기간 무모하게 살육전을 벌이는 식이었다. 

 귀족들은 명예롭게 싸운다며 칼과 도끼를 들고 장궁(長弓) 사수를 향해 용맹하게 돌진하곤 했다. 이런 무

지한 행태 덕분에(!) 백년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 귀족이 마저 사라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요크 가문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요크 공작 자신도 사망하였기에 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10년 후 제정신을 찾은 헨리 6세가 왕권을 되찾기 위해 도전해 왔으나 다시 패배하여 런던

탑에 갇혔다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마저 전사하여 랭커스터가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요크가의 지배가 탄탄

하게 굳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가문 내분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에드워드 4세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두 아들은 12세와 9세

의 어린아이였다. 장남이 에드워드 5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두 달 후 런던탑에 갇히고 동생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왕위는 선왕의 동생 리처드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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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부가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는 것은 역사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 이번 경우에도 리처드가 

어린 왕 에드워드를 죽였을까? 역사가들은 정황상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지만, 결정적 사료가 

없으므로 단정할 수는 없다. 

 

 때때로 중요한 문서가 뒤늦게 발견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출신 학자이자 수도사인 도메니코 만치니

(Domenico Mancini)가 1482~1483년에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궁정에서 벌어진 사태를 직접 목도한 후 

기록을 남겼다. 이 문서는 오랫동안 프랑스의 릴(Lille) 도서관에 묻혀 있다가 1934년에 가서야 발견되었

는데, 역시나 리처드의 행적에 대해 부정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선왕 에드워드 4세의 장례식 후 왕실과 대귀족들은 보좌위원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어린 왕을 보필하자는

의견이었으나, 리처드는 홀로 섭정(Lord Protector)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다. 곧 반대파 인사들을 체포하

여 살해하더니, 어린 국왕과 동생을 런던탑에 유폐했다. 그러고는 현왕의 정통성을 부인했다. 

 

 에드워드 4세가 다른 여성과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왕비와 결혼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태어난 현왕은 서자

라서 정통성이 없으며, 결국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는 것이다. 그가 대관식을 치르고 리처드 3세라

는 이름으로 왕위를 차지한 이후 어린것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이 시기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곧 국왕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사방에서 리처드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주도자 버킹엄공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에게 귀국하여 왕위를 물려받으라고 제안했다.

 튜더 가문의 헨리는 혈통 상으로 랭커스터 왕실에 제일 가까운 인물이다. 

 

 일찍이 프랑스에 피신해 있던 그는 무명의 존재였고 전투 경험도 없었으나, 프랑스의 지지를 받는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한 프랑스 전사들을 앞세우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한 헨리는 보즈워스

벌판에서 리처드 군과 최후 결전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는 마지막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 (영국사에서 마지막으

로 전사한 국왕이다). 일설에 의하면, 리처드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전투에 나가 싸웠는데, 그가 죽었을 때

관목 숲에 떨어진 왕관을 부하들이 찾아서 헨리 튜더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승리를 거둔 튜더는 요크가

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원수 가문 간 갈등을 봉합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새 왕조를 열었다. 이것이 영국

사에서 통상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튜더 왕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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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가 그토록 왕관을 차지하려 한 데에는 물론 개인의 야심이 발동한 면이 있겠으나, 자기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더 통치를 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작용했던 것 같다. 사실 짧은 기간이기는 하나 그

의 통치 행위를 보면 분명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다. 

 

 1484년, 그의 치세에 유일하게 열렸던 의회에서 리처드는 평민들을 보호하는 정책들을 내놓았다. 범죄 

행위로 체포된 사람에게 보석을 허가하고,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재산 몰수를 금지했으며, 토지 관련 혹은 

직물 교역에 관한 법 조항들을 정비하고, 지방의 불합리한 재판소들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분명 합리적

개혁을 시도하려 했던 것 같다. 역사상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그가 승리했

다면 그는 유능한 영국 국왕의 반열에 올랐을 수도 있다. 

 

 물론 실제 일어난 일로 평가하면 그는 당대에 이미 폭군(tyrant) 소리를 들었다. 특히 다음 왕조에서 활약

한 셰익스피어가 최악의 인간 말종으로 묘사했다. '리처드 3세'에 그려진 리처드는 발을 심하게 저는 꼽추

로서, 친형 클래런스경을 모함하여 런던탑에 가두고 부하들을 시켜 포도주 통에 밀어 넣어 익사시키는 

것을 비롯해 수많은 정적을 무참하게 죽이는 악인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악의 극단을 치달은 인물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가 리처드를

지나치게 악마화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마치 조선시대 문인이 고려시대 마지막 왕을 사악

하게 그리는 것처럼,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 시대 최후의 왕을 나쁘게 그렸을 가능성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3세 우호 협회(Society of Friends of King Richard III)' 같은 모임이 지나친 

역사 왜곡을 교정하겠다며 오랜 기간 노력해 왔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문학과 예술이 갖는 강력한 영향력을 이기기는 어렵다.

 사람들의 뇌리에 강력히 박힌 이미지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것이다.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인 '리처드 3세'에서 주인공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정적들과 싸우며, 최후의 

권력 을 잡기 위해 기꺼이 모략을 일삼는 악마의 배우 역할을 한다. 악이 횡행하는 어둠의 세계에서 절름

거리는 몸짓으로 몸부림치며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다. 

 

 "양심이란 비겁한 놈들의 변명이야! 평화와 정의란 가진 놈들이 못 가진 자를 위협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 이 팔의 힘이야말로 양심이고 칼이 곧 우리의 법이다. 닥치는 대로 해치워라! 천국에 못 갈 바에야 

손에 손을 잡고 모두 지옥으로 가는 거다." 

 

 영국의 대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경이 연기하는 리처드 3세를 DVD로 보니 차라리 젠틀한 인상을 받는다. 

 최근 우리나라 무대에서 열연한 황정민의 'K-리처드 3세'가 훨씬 처참하고 잔혹하고 독하다. 요즘 우리

나라 정치판이 장미전쟁 시기 잉글랜드보다 더 악하게 싸움을 벌여서 그런가…. 

 

[21세기에 돌아온 리처드 3세]

 

관도 없이 묻혀 있던 유골 500년만에 주차장서 발견…

두개골엔 칼자국이 11개

 

 최근 역사학계의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리처드 3세의 유골이 발견된 일이다. 

 2012년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런던 북쪽 160㎞ 레스터시의 시내 주차장 바닥을 조사하여 유골을 찾아

냈고,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과 DNA 테스트를 통해 이 유골이 리처드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가 전사한 후 

작은 교회에 묻혔다가 이 교회가 무너져 사라지는 바람에 왕의 유골도 땅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유골을 살펴본 결과 전체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묘사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은 척추

측만증으로 몸통이 크게 휘어 있었고, 해골을 스캐닝해서 만들어본 얼굴 모습은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

에 있는 사악한 모습과 꽤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 나 있는 11곳의 칼자국, 특히 후

두부의 두개골 일부를 깨뜨릴 정도의 강력한 칼자국은 마지막에 그가 죽을 때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을 받지 못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관도 없이 묻혔다가 유골마저 유실되었던 이 불행한 국왕은 500여년이 지나서야 다시 정중하게

재 매장되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한 의식을 통해 레스터 대성당에 

시신이 다시 묻힐 때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영국 계관시인 캐럴 앤 더피의 시를 낭독했다. 각고

의 노력 끝에 영국 역사학자들은 시를 낭독한 컴버배치가 리처드 국왕의 먼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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