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현대사] 각하가 곧 국가다 - 차지철 (06/06)
2009. 01. 13.에 ParkJungHee님이 올린 동영상
KBS 인물 현대사(03.10.31)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의 심장' 박정희대통령과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그는 박정희대통령의 마지막 심복이자 그림자였다.
그는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계기로 운명적으로 만나 죽음을 같이 했다.
5.16당시 육군대위로 쿠데타에 참여, 박정희소장의 경호장교를 맡으면서 그의 생은 박정희와 분리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었다.
차지철이 대통령경호실장에 임명된 것은 1974년 8월 22일,
같은 해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피격,사망으로 자리를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3공화국 3번째 경호실장에 임명되어 경호실을 권력의 중심으로 키워나간다.
차지철의 경호실은 단순히 대통령의 신변을 경호하는 차원을 넘어 대통령의 권력을 경호하는 이른바 정권의 파수꾼역할을 자임한다.
대통령의 안전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면서 모든 가치 기준을 여기에 맞췄다.
그의 방에는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라는 표어가 나붙었다.
이것이 차지철의 대통령관이자 경호자세였다
각하를 지키기 위해서라라는 명분,차지철은 이 명분을 최대한 활용,대통령의 권위를 빌어 경호실의 역할과 위상을 무한 확장했다.
경호실에 차장제를 신설, 차장을 차관급 상당으로 명시함으로써 경호실장의 지위를 장관급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대통령경호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육해공군 참모총장이 위원, 차지철이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2인자로써의 위세를 과시했다.
경호부대의 무장도 탱크에 장갑차,헬기 등 사단규모의 화력을 갖춘 중화기를 동원했다.
유사시 민간인 신분인 경호실장이 수경사 병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관련법도 만들었다.
당시 경복궁에는 경호부대인 30경비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30경비단 연병장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국기하기식'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행사가 치러졌다.경호실 병력과 화기를 총동원한 사열식으로 이 행사에 국회 요인,정치인,장관,군장성 등을 수시로 불러 행사를 참관시킴으로써 자신이 권력의 2인자임을 세상에 과시했다.
돌아서서 비판은 했지만 아무도 감히 그 초청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이처럼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은 단순히 대통령의 안전만을 책임지는 것 이상의 위세를 과시했다.
10.26이 있기 직전 경호실은 무소불위의 권부였으며 차지철은 대통령 다음 가는 권력의 2인자였다. 그는 유신시대 제 2의 권력자로서 자신의 직분을 넘어선 정치개입을 하게된다.
국회,행정부,군 인사 등를 좌지우지했고,야당을 대상으로 정치공작을 했으며,국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과도한 정치 개입은 유신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도화선이 된다. 권력의 2인자로 부상한 그의 행적을 쫓아 유신시대 말기의 정치 상황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