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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의 한국사] 용산(龍山)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용산(龍山) 

                                                          조선일보. 발행일 : 2022.04.14.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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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이봉창 잠든 곳… 한반도 교통·물류 중심지였죠

 

 다음 달 10일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는 대통령 집무실을 서울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길 계획입니다. 

 한양 도성 바로 남쪽, 남산과 한강 사이에 자리 잡은 용산은 역사적으로 무척 파란만장(여러 가지 곡절이 

많고 변화가 심함)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용산(龍山)이란 지명은 '지형이 이무기 (전설상의 동물인 

뿔 없는 용)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한강과 서울을 잇는 교통 중심지

 

 용산 지역에 처음으로 정치 세력이 등장한 것은 백제 초기였다고 합니다.

 백제가 초대 임금 온조왕(재위 기원전 18~서기 28) 이후 세력을 뻗으면서 용산을 비롯한 한강 일대가 

백제 세력권에 들어간 것이죠.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491)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가 수도를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자 용산은 

고구려의 영토가 됐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엔 '한산주' '한양군' 소속이었고, 고려 시대'양주' '남경' 

'한양부'의 일부였습니다. 

 

 1392년 개국한 조선 왕조수도를 용산 북쪽인 한양으로 정하면서 용산은 교통과 물류에서 매우 중요

한 지역이 됩니다. 당시 한양은 동서남북 4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 안을 의미했어요. 

 

 용산은 한양도성 밖의 교외인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이였죠. 지금은 한강 하구가 휴전선에 포함돼 

수로 교통이 막혔지만, 옛날에는 서해에서 배를 타고 넓은 한강을 따라 한양 근처까지 들어올 수 있었거

든요. 이 때문에 용산은 전국에서 몰려온 조운선(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앞 다퉈 모이는 곳이었습니

다. 

 

 조선 후기 한강을 중심으로 나라의 세곡(稅穀·세금으로 내는 곡식)을 수송하고 활발한 상업 활동에 종사

했던 사람들이 경강상인(京江商人)이었는데요. 이들의 본거지가 바로 용산이었습니다. 용산에는 세곡과 

군량미, 군수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어요. 18세기 무렵 용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도시'가 됐다

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화와 침략의 물결이 한꺼번에 밀려들다

 

 1876년(고종 13년) 개항이 이뤄진 후 개화의 물결이 한양보다 한발 앞서 밀려온 곳도 용산이었습니다. 

 1884년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이 들어섰고,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승인

된 이후엔 외국인들이 들어와 원효로를 중심으로 종교와 상업 활동을 펼쳤습니다. 1888년엔 한강에 증기

선이 떴고 1900년에는 원효로 4가까지 이르는 전차가 개통됐죠. 

 

 하지만 외부의 압박에 의한 개항'문명의 유입'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두 얼굴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용산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1882년 신식 군대와의 차별을 겪었다며 구식 군대가 분쟁을 일으

킨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했습니다. 

 

 역시 한강과 한양 도성 사이라는 지정학적 이점 때문이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이긴 

일본은 용산에 자기들 군대를 주둔시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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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또 승리하면서 용산의 비극이 본격화됩니다.

 1904년 대한제국과 강제로 맺은 '한일의정서'에 '일본은 군사 전략상 필요한 곳을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용산에 일본군 수만 명이 주둔할 수 있는 대규모 군사 기지를 

세웠던 것이죠. 

 

 그래서 990만㎡에 가까운 용산 땅을 헐값에 매입해 약 380만㎡를 군사 시설로 사용했고, 1945년 일본

이 한반도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곳을 무력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습니다. 

 

독립유공자들이 잠든 곳

 

 일본이 매입한 땅에 군사 시설과 함께 들어선 '철도 타운' 또한 문명과 침략의 두 얼굴이 극적으로 공존

한 장소 중 한 곳입니다. 용산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철도 공장, 동쪽에는 철도국·철도 관사·철도 병원

이 자리 잡았습니다. 일제는 한반도에 철도망을 만들어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침략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는데요. 그래서 용산에 한반도 철도의 핵심 기지를 만든 것이었죠.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용산에 '침략과 수탈의 중심기지'가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용산이 '한반도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됐다는 것이죠. 경부선·경인선·경의선·경원선·호남선 같은 주요 철도

노선들과 모두 연결된 역이 바로 용산역이었습니다. 용산으로선 그림자인 동시에 빛인 셈이었죠. 광복 다음

해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첫 열차인 '조선해방자호' 제작이 이루어진 곳도 용산이었습니다. 

 

 광복 이후 용산은 또다시 많은 파란을 겪었습니다. 일본군이 물러난 용산 군사 기지엔 38선 이남을 일시 

점령한 미군이 주둔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미군은 철수했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미군은 한반도에 돌아왔고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다시 용산에 주둔하게 됐죠. 

 

 얼핏 보면 일본군이 미군으로 바뀐 것 같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일본군 주둔이 침략을 위한 1904년 한일의

정서에 의한 것인 반면, 미군 주둔은 정전협정 이후 북한과 중국의 재침략을 우려한 한국 정부의 요구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뤄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용산의 미군 기지는 경기 평택

으로 이전하는 중입니다. 

 

 누군가는 용산이 '오욕의 역사가 서린 곳'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유공자들의 묘소가 된 용산 효창공원도 있습니다. 이곳엔 김구·윤봉길·이봉창·백정기·이동녕·조성환

·차이석 같은 독립유공자들이 잠들어 있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유해 없는 묘소)도 있습니다. 

 

 용산 해방촌은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38선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새로운 조국에서

살아갈 꿈을 꾸며 정착했던 곳입니다. 세계 각지의 문화가 집결돼 서울에서도 가장 국제화된 지역인 이태

원, 한국 역사와 문화의 보고(寶庫)인 국립중앙박물관 역시 용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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